2018. 3. 1. 08:30ㆍ이슈
[더팩트ㅣ박대웅 기자] "우리 이민갈까?"
배우 조민기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11번째 피해자가 공개한 음란카톡 내용을 보던 아내가 깊은 한 숨 끝에 내뱉은 첫마디다. 아내의 말에 다섯살배기 딸아이의 얼굴이 겹쳐보였던 필자도 순간 "그럴까"라는 말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차마 "그러자"라고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산 입에 거미줄 치겠느냐마는 당장 어디로 가서 뭘 해먹고 살지, 현실적인 걱정들이 밀려왔다. 아내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민기 음란카톡의 피해자가 '내 딸이었다면 어찌해야할까'라는. 아마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분노일거다. 그리고 '뜬소문'에 고통받는 딸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 올 거다. '여자도 뭔가 의도가 있었다', '왜 그런 자리까지 따라갔냐', '꽃뱀 아니냐' 하는 근거 없는 소문 말이다. 이어 가해자가 제기하는 '역고소'로 피해자가 아닌 피의자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2차 가해'에 시달리는 딸의 고통도 함께해야 할 게 분명하다.
실제로 용기를 내 성폭력 피해를 고발한 많은 이들이 보복성 고소에 휘말린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SNS에 게시한 후 가해 지목인으로부터 사이버 명예훼손죄로 역고소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경우 피해자는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으며 꽃뱀이 아닌 피해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가까스로 묻어놨던 지난 날의 환부를 스스로 꺼내보이는 이 과정은 분명 고통스럽다.
미투(Me_Too)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가운데 '나부터' 변화를 외치자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더팩트DB아직 다섯 살인 딸을 위해 정말 이민이 답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애초에 문제의 근원을 제거하면 걱정도 없을 테니 말이다. 얼마 전 부모와 자녀가 함께하는 성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 있다. 당시 강사는 딸아이에게 누군가 원치 않는 신체 접촉을 시도한다면 "안돼요". "싫어요"라고 단호하게 말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면서 부모에게 아이들과 잦은 스킨십으로 어떤 게 부적절한 스킨십인지 아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조언했다. 쉬쉬하고 감추는 건 결코 아이를 위한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맞는 말이다. 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나부터 먼저 나서서 막겠다는 '미퍼스트(Me_First)'운동이 필요하다. 성추행이나 성희롱에 항의하는 건 결코 '분위기를 깨는 일'이 아니다. 단 한 명이라도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라고 문제를 제기한다면 가해자는 고립될 수 밖에 없다. 나부터 다수의 침묵을 깨는 '모난 돌'이 돼야 한다. 비록 '정'을 맞을지언정 나부터 용기를 내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우리들의 딸, 우리들의 오누이, 우리들의 친구들이 불합리와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변화의 시작은 언제나 나부터다.
bdu@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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