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22. 05:30ㆍ이슈
가난과 역경 극복한 '보릿고개' 상징세대...10년 무명 설움 딛고 '성공'[더팩트|강일홍 기자] 가수 배일호(62·본명 김종원)는 젊은 날 누구보다 고달픈 삶을 살았다. 이를 딛고 일어선 오뚝이 인생이다. 1980년 '봐봐봐'란 곡으로 데뷔했지만, 그가 대중적 주목을 받은 것은 '우리 몸엔 우리 농산물'이란 슬로건을 담은 '신토불이'(92년)가 뜨면서다. 농군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지게질로 가난과 부딪치며 생계를 꾸린 그에게 이 노래는 인생곡이 됐다.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그는 배고픈 '대한민국 보릿고개' 상징 세대다. 유년 시절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할 만큼 가난했다. 그런데 정작 배고픔보다 더 힘든 것은 도박과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그는 열 일곱의 나이에 기차비만 챙겨 도망하듯 서울로 상경했다.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일용직부터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다시피하면서도 이런 굳은 각오를 되새기며 '낯선 서울살이'를 견딜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막연히 품었던 가수 꿈을 현실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방송 진행 보조(FD)를 하면서다. 인기가수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다행히 노래엔 자신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고난과 역경을 끈기와 노력으로 극복하며 '인생역전'을 일궈냈다.
필자는 90년대 중반 그를 처음 인터뷰하면서 "반드시 인기가수가 되겠다"는 확고부동한 의지에 놀란 적이 있다. 과연 10여 년의 무명생활 끝에 '신토불이'로 바람을 일으키더니 '99.9' '장모님' '순이야' '꽃보다 아름다운 너' 등 내놓는 노래마다 히트를 쳤다. 그의 특별한 가수 인생을 들어봤다.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19일 오전 서울 상암동 <더팩트> 사옥에서 진행됐다.
"뜻이 있으면 길은 있는 법이죠." 배일호는 불행한 환경을 딛고 가수로 인생역전의 꿈을 이뤘다.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19일 오전 서울 상암동 <더팩트> 사옥에서 진행됐다. /김세정 기자-유년시절엔 끼니를 거르고 정규 학교생활을 못할 만큼 힘든 시기를 겪었다고 들었다.
6.25 직후 세대는 다들 힘들었던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더 힘들고 고달팠어요. 아버지는 3대 독자로 귀하게 자랐고, 물려받은 재산도 많았는데 술과 도박에 빠져 가족을 지키지 않았죠. 충남 부여가 고향인 아버지는 다른 지역까지 원정 도박을 다녔고 어머니는 과일 생선 행상을 하며 2남3녀를 키웠어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으니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할 수 없었어요. 제가 태어난 곳은 부여지만 한 살 때 어머니가 논산에서 아버지의 행방을 찾은 뒤 그곳에 정착했다고 해요. 논산이 제 고향이 된 이유죠. 어쨌든 어린 시절에 정들어 늘 생각나고 그리운 곳이니까요.
배일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명석한 아이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가정 형편상 정규 학교생활은 꿈도 꾸지 못했다. 초등학교 입학은 했지만 월사금(月謝金, 학교에 다달이 내던 수업료)을 못내는 데다 점심을 굶는 일이 다반사여서 학교에 가는 대신 동네 허드렛일을 도왔다.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철마다 행상(과일 또는 생선)을 나갔고, 그는 자연스럽게 어른들 틈에 끼어 반품앗이 일을 해야했다. 공부보다 생존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엔 형편상 친구들처럼 가방 메고 학교 가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고 말했다. 후에 그는 대안학교를 거쳐 정규 학력과정을 마쳤다.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가수의 꿈을 키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형편상 학교엔 갈 수 없으니 어린 마음에도 분출구가 필요했던 거죠. 틈만 나면 노래를 불렀어요. 당시엔 마을마다 유선방송이 있었고, '유정천리' '이별의 부산정거장' '비내리는 호남선' '신라의 달밤' 같은 흘러간 가요를 많이 들을 수 있었죠. 어려서부터 이런 노래를 자꾸 따라 부르고 좋아하다보니 저절로 가수를 동경하게 되더라고요. 주변에서도 노래 잘한다고 칭찬을 많이 해주니 자신감이 생기고 틈만 나면 콩쿠르 같은 노래대회에 출전했어요. 상을 받으면 우쭐해져서 마치 진짜 가수가 된 기분이었죠.
사춘기를 벗어날 무렵 그는 고향 논산에서 막막한 가난을 피해 서울로 올라왔다. 살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 제때 끼니를 챙겨먹기도 벅찼다. 공사판 막일부터 멍게 해삼을 파는 포장마차까지 안 해본 일이 없을 만큼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를 지탱해준 유일한 버팀목은 가수를 향한 꿈이었다. 뜻이 있으면 길은 있는 법, 배일호는 작곡가 김학송 사무실을 찾아가 주경야독으로 정식 노래 공부를 했다. 이후 그는 틈틈이 지역 노래자랑대회에 참석해 입상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아 밤무대에 설 기회를 잡는다.
농민들의 어려움을 공감한 게 토종 신토불이 가수 탄생 계기. 묵직하고 깊은 울림의 목소리를 가진 그는 데뷔 전까지 배호 노래를 좋아하고 모창을 해오다 예명도 배일호로 바꿨다. /김세정 기자-이름만 가수로 지내다 '신토불이'란 인생곡이 뜨면서 긴 무명설움을 털어냈다. 이 노래를 부르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궁금하다.
1990년대 초 우루과이 라운드가 화두였어요. 농민들이 상경해 시위도 많이 했고요. 정부가 주도하는 무역개방은 피할 수 없는 세계적 추세였지만 농민들한테는 당장 생계가 달린 문제라 심각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지게질로 잔뼈가 굵은 저는 농민의 처지와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남의 일처럼 무관심할 수 없었죠. 농민들을 대변하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어요. 작사가 김동찬님을 찾아가 상의한 끝에 '신토불이'란 제목이 나왔고, 작곡가 박현진님이 곡을 써 마침내 이 노래가 탄생한거죠.
배일호는 군복무(5사단 인사과) 후 군산 서해방송 '가수왕' 선발대회에서 1위를 한 뒤 '봐봐봐'(80년)로 데뷔했다. 묵직하고 깊은 울림의 목소리를 가진 그는 데뷔 전까지 배호 노래를 좋아하고 모창을 해오다 예명도 배일호로 바꿨다. 가수 데뷔 13년 만인 93년 '신토불이'로 무명가수 설움을 벗었다. 우루과이 라운드는 1986년 9월 남미 우루과이에서 개최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각료회의를 시작으로 1993년 12월 최종 타결된 다자간 무역협상이다.
-노래 한곡이 히트하려면 여러 변수들과 맞아떨어져야 한다. 당시 사회분위기로 보면 농민을 대변하는 노래가 달갑게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나.
정책적으로 무역협상 타결이 꼭 필요한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달갑게 보일 리가 없었죠. 국가적으로 보면 농산물 수입을 받아들여야 고가의 자동차나 전자제품 등을 수출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제 노래는 그걸 반발하는 농민이나 어민들 입장을 대변하고 있잖아요. 한때 제 노래는 방송 금지곡이 됐을 정도였죠. 방송에서 틀어주질 않았어요. 반대로 농민 시위현장에는 제가 단골로 불려다녔죠. 인기가수보다 더 인기가 있었으니까요. 신문과 방송에서 이슈 인물로 자주 언급되고 인터뷰를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제 노래가 뜨는 행운을 안았어요.
배일호는 '신토불이'가 뜨면서 일약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슈가 되자 노래 틀기를 주저하던 방송사들도 잇달아 그를 소개했다. 국내 언론은 물론 해외 특파원 인터뷰도 종종 했다. 그는 "당시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이 저를 인터뷰하면서 '신토불이를 일본에서 차용한 게 아니냐'고 주장한 게 기억이 난다"면서 "엄연히 동의보감 등 의약처방과 관련된 우리 고서에도 등장하는 단어를 일본이 원조인듯 말하는 걸 보고 뭔가 의도를 갖고 이슈화하려고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국악과 성악 장르에도 영역을 넓힌 배일호는 자신의 스물 다섯 번째 앨범에는 가곡 위주로 선곡해 연내 선보일 예정이다. 사진은 유명 성악가와 함께 TV 음악프로그램에 듀엣 출연중인 모습. /더팩트 DB-KBS에서 7년간 방송 진행보조(FD)를 한 게 가수 활동에 큰 도움이 됐다고 들었다.
맞아요, 방송 녹화장 진행보조를 할 때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칠 각오로 일을 했어요. 성공을 하려면 무슨 일을 하든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일념이었죠. 새벽부터 나와 항상 남들보다 먼저 준비하고 체크하는 습관을 들였어요. 비가 내리는 날 생방송 야외 촬영까지 큰 문제 없이 준비해내는 걸 보고 연출자분들이 혀를 내두르더라고요. 제가 하도 일을 열심히 하니 누군가 '마약 먹은 놈'이라고 했고, 그게 와전돼 진짜로 단속반이 뜬 적이 있어요. 조사를 받고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만큼 성실하게 흘린 땀이 훗날 가수 활동하는 데도 좋은 이미지로 비친거죠.
배일호는 가수로 빛을 보지 못하던 80년대 후반 '전국노래자랑' '6시 내고향' '행운의 스튜디오' '백세퀴즈쇼' 등 KBS 주요 프로그램 FD로 활동했다. 이중 '6시 내고향'과 '전국노래자랑'은 KBS 대표 장수프로그램이 됐다. '신토불이'를 발표할 무렵엔 FD 당시 그가 보여준 책임감과 성실성을 높이 평가받아 방송출연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는 현장 세트를 조율하고 각종 소품 등을 챙기며 어떤 악조건 상황에서도 차질없이 녹화할 수 있게 해 PD들 사이에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전국노래자랑' MC를 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처음 듣는 말인데 무슨 얘기인가? 혹시 알려지지 않은 스토리가 있는건가.
네, 사실입니다. 송해 선생님이 한때 MC를 중단한 사건이 있었잖아요. PD와 갈등이 생기면서 마이크를 잡을 수 없게 되자 가수 현철 씨와 제가 즉석에서 마이크를 잡았어요. 분명히 당일 녹화분 MC를 맡아 1시간 30분간 무사히 마쳤어요. 다만 방영이 되지 않았을 뿐이죠. 그 사건은 지금도 가수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예요. 당시 PD는 홍순창 씨였는데 원칙주의자였던 만큼 인간적인 분이셨죠. 자기 손으로 교체를 했지만 자신이 연출을 그만 둘 무렵에는 앞장 서서 송해 선생님으로 원위치 시켜놨으니까요.
송해가 마이크를 놓는 굴욕을 겪은 것은 바로 술 때문이다. 당시 '전국노래자랑'을 연출하던 홍순창 PD는 원칙을 중시하고 이를 엄격하게 적용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출연가수나 스태프 중 누구라도 지각을 하면 예외 없이 '출연불가'라는 원칙을 적용했다. 애주가인 송해는 녹화 때면 전날 으레 지자체 관계자나 지역 유지들과 술 한잔 하곤 했는데, PD가 이를 못 하게 하자 알력이 생겼다. 1994년 경북 영천편 녹화 때다. 홍 PD는 이 원칙을 깨고 늦은 송해 대신 현장에서 배일호와 가수 현철을 MC로 삼아 녹화를 했다. 이 녹화분은 결국 방송되지 않았고, 추후 김선동 KBS 아나운서가 후임MC로 결정됐다.
배일호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열정의 사나이다. 그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가곡, 팝송, 트로트 등 복합 장르에 미술전시까지 곁들인 토털 콘서트를 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김세정 기자-지금은 고향에 노래비가 세워졌을 만큼 성공한 가수가 됐다. 마지막으로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나 향후 바람이 있다면 얘기해달라.
39년 가수활동을 하며 아직 콘서트나 디너쇼를 못했어요. 히트곡 수로만 따진다면 벌써 했어야 맞죠. 한데 전 팬들에게 좀더 완벽한 무대를 만들기 전까지는 선뜻 용기를 낼 수 없었어요. 미루고 미루다 보니 아쉬운 마음만 안고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하지만 기왕 늦었으니 이제 하려면 정말 제대로 해야겠다는 욕심이 나요. 가곡, 팝송, 트로트 등 복합 장르에 미술전시까지 곁들인 보은콘서트를 해보고 싶어요. 물론 팬들께 보답하는 차원에서 무료 초대해야죠.
배일호의 열정은 나이를 무색하게 한다. 그만큼 새로움에 대한 열망과 욕구가 넘치기 때문이다. 음악적 이론을 완벽하게 터득한 뒤엔 자신의 히트곡 '꽃보다 아름다운 너' '순이야' '친구야' 등을 직접 작사 작곡한 싱어송라이터로 변신했다. 뒤늦게 배운 국악과 성악에도 일가견이 있다. 국악인 신영희 씨로부터 사사했고 성악앨범도 준비 중이다. 연내 선보일 자신의 스물 다섯번째 성악앨범은 아예 가곡들로만 선곡해 기대를 모으고 있다.
배일호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고향 젊은이들에게 꾸준히 장학금을 기부해왔다. 사진은 논산 공설운동장 인근 공원에 세워진 '신토불이 노래비'. /더팩트 DB배일호는 충남 논산을 빛낸 인물 중 한명이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고향 젊은이들에게 꾸준히 장학금을 기부해온 선행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논산시와 주민들은 그의 순수하고 따뜻한 고향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성금을 모아 지난 2007년 논산 공설운동장 인근 공원에 '신토불이 노래비'를 세웠다.
그의 예술적 감각과 열정은 가요계에서도 소문 나 있다. 유명 화가인 아내 손귀예(서양화) 씨와는 장르를 뛰어넘은 예술혼으로 교감하고 있고, 결혼 35주년을 맞는 오는 11월 11일에는 서울 목동의 한 갤러리에서 회심의 두 번째 부부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일찌감치 화가(문인화)로 변신해 10여년 전부터 전시회를 갖고 있다.
그는 또 평소 워낙 점잖고 조용한 스타일이어서 '가요계 젠틀맨'이란 별칭도 붙어 있다. 가수지망생 시절 군산서해방송 노래자랑대회에서 만난 뒤 40년 가까이 오누이처럼 다정한 사이로 지내고 있는 후배 가수 현숙은 "(배)일호 오빠만큼 순박한 남자는 두 번 다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필자한테는 가장 한국적인 '신토불이 가수'의 진면목을 보는 듯 포근한 미소만으로 친근하게 와닿았다.
eel@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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